우리가 배우지 못한 시인, 우리가 잃어버린 문학
오늘 손석희님의 12시 라디오를 듣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백석.
참 좋았다. 라디오에서 시인의 이름이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오늘은 유난히 그랬다.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윤동주의 「서시」는 배웠다. 별을 헤는 마음도 배웠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도 배웠다.
그런데 백석은 배우지 못했다.
평생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지켜낸 시인이었는데, 그의 이름과 작품은 오랫동안 우리 교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작품을 자유롭게 읽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분단은 사람과 땅만 갈라놓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과 기억할 수 있는 시인까지 갈라놓았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시는 죄가 없는데, 시인의 행선지가 시를 읽을 자격까지 결정했던 것이다.
하늘을 바라본 윤동주, 땅을 품은 백석
윤동주와 백석은 모두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그러나 두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윤동주의 시에는 하늘과 별, 양심과 부끄러움이 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그는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백석의 시에는 고향과 가족, 음식과 사투리, 가난한 이웃과 마을의 풍경이 있다. 평안도의 어느 집에서 먹던 음식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라져 가는 생활의 풍경을 시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윤동주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백석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모습을 비추는 창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두 시인을 그렇게 간단하게 나눌 수는 없다. 윤동주에게도 고향이 있었고, 백석에게도 깊은 내면의 고독이 있었다. 다만 두 시인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양심과 삶의 터전이라는 두 세계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다른 한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준다.
시인 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
*잠풍(潛風) 날씨 = 바람이 잠든 날씨 (평안도 방언)
손석희님이 한 편 낭독하는데 울컥하는 건… 나이가 먹어서인가. 처음 듣는 시인데도 무언가가 그리워진다.
직접 가보지 않은 마을인데 고향처럼 느껴지고, 경험하지 못한 생활인데도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다가온다. 시인의 언어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 한 시대의 공동체적 기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시인을 오랫동안 충분히 읽지 못했다.
분단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갈라놓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잊혔고, 어떤 작품은 금지되었으며, 어떤 기억은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백석을 뒤늦게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시인 한 명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배우지 못한 문학을 다시 배우는 일이고, 끊어진 문화의 기억을 이어 붙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가만큼이나 무엇을 배우지 못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이라도 읽으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낯설게 느껴지고,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이 뒤늦게 마음에 들어온다.
시도 그렇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외웠던 시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삶의 언어로 다가오기도 한다. 반대로 학교에서 만나지 못했던 시인이 지금의 나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문학을 읽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 속에 담긴 외로움과 그리움, 사람에 대한 애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
윤동주를 읽으며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다. 백석을 읽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과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한 시대는 시인을 침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는 끝내 독자를 찾아온다.
오늘 라디오에서 만난 백석이 반가웠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윤동주를 배웠다. 이제 백석을 읽자.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시인을 지금이라도 만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늦었지만 좋은 문학 수업이 시작되는 셈이다.